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이징 8월 폭풍 사건 (문단 편집) === 사령부를 포격하라 === 이 와중에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 제8기 중앙위원회 제11차 전원회의]]를 소집, 류사오치가 독재를 휘두르고 부르주아 계급과 제휴했다고 맹비난했다. 원로들은 마오쩌둥의 과격한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고 이에 마오쩌둥은 8월 6일 [[린뱌오]]를 호출했다. 린뱌오는 류사오치와 원로들을 맹비난하며 "폭풍을 만들고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서 세상을 뒤집어 엎자."라고 외쳤다. 총회 마지막 날의 비밀투표에서 중앙위원회는 11명으로 구성된 새로운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구성, 류사오치를 부주석에서 실각시키고 린뱌오를 유일한 부주석, 새로운 2인자로 선출했다. 펑전과 펑더화이가 정치국에서 탈락했으며, 장원톈과 루딩이가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탈락했다. 대신에 쉬샹첸, 녜룽전, 예젠잉 등 원수들이 정치국 위원으로 보선되었으며, 신임 베이징 제1서기 겸 시장 이설봉, 공안부장 셰푸즈, 쑹런충이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보선되었다. 정치국 후보위원이었던 캉성은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보선되었으며, 신임 선전부장 타오주와 마오쩌둥의 비서 천보다도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었다. 8월 8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자본주의 노선을 선택한 당내 권력자들을 공격할 것이라는 내용의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문>을 발표했다. 소위 <16조>라 불리는 총회의 성명이 발표되기 3일 전인 8월 5일, 마오쩌둥이 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 석상에서 이름도 유명한 <사령부를 포격하라:나의 대자보>라는 대자보를 작성했다. 마오쩌둥은 8월 7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참석자들에게 대자보를 보여주었고, 참석자들은 경악하였다. 회의가 끝난 이후 공작원들이 이를 붉은 종이에 붓으로 베껴써서 중난하이 인근의 수영장 쪽 식당 바깥에 붙이면서 세상에 공포되었다. 문제의 대자보는 1년 후인 1967년 8월 5일, 인민일보 1면에 게재된다. 8월 18일, 100만명의 홍위병들이 천안문 광장에 운집하였다. 홍위병들에게는 붉은 완장이 지급되었고 이들은 자정부터 마오쩌둥을 기다렸다. 동이 틀 무렵 마오쩌둥이 나타나 잠시 홍위병들과 악수를 나누었고 [[린뱌오]]가 "착취 계급의 모든 낡은 사고와 낡은 문화, 낡은 전통, 낡은 관습을 타도하라!"라고 연설했다. 이어 베이징 사범대학교 학생 쑹빈빈이 마오쩌둥에게 직접 홍위병 완장을 채워주는 영광을 누렸다. 마오쩌둥은 쑹빈빈에게 이름의 뜻을 물었고 이름이 '점잖다'란 뜻이라는 대답을 듣자 '혁명은 점잖게 하면 안된다. 무력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지시, 쑹빈빈은 즉각 쑹야오우(무력을 빛낸다는 뜻)로 개명했다. 마오쩌둥을 직접 보게 된 홍위병들은 이제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베이징 3여자 중학교에서 홍위병들이 교장을 때려죽였고 학생 주임을 고문하여 자살하도록 강요했다. 베이징 사범대학 산하 중학교에서 교사들이 끓는 물을 끼얹는 고문을 당했고 베이징 교육대학 산하 중학교에서도 홍위병들이 교사를 때려죽였다. 홍위병들은 교사들을 붙잡아 못과 배설물을 삼키게 하고 서로 따귀를 때리게 강요했다. 비단 교사들뿐만 아니라 마오쩌둥의 눈에 거슬렸던 [[지식인]]들도 타도 대상이 되었다. 중국 국가의 가사를 작성했었던 희곡작가 [[톈한]]이 길거리로 끌려나와 조리돌림 당한 후 린치되었고[* 이때문에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국가를 연주할 때 가사를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 <낙타상자>의 저자인 67세의 [[라오서]]도 베이징 8중학교[* 이 학교는 현재도 [[푸싱먼역]] 근처에 있다.]에서 몰려나온 홍위병들에게 조리돌림과 고문을 당한 후 피를 흘리며 쓰러졌는데 흥분한 홍위병들은 태도가 불량하다고 그를 밤새도록 구타하고 다음날 아침이 밝아서야 풀어줬다. 수치를 이기지 못한 그는 그길로 연못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정작 쑹빈빈은 나중에 [[문화대혁명]]의 광기를 주동했던 본인의 과거[* 쑹빈빈은 선동당해서 사회의 광기에 휩쓸렸던 대다수의 홍위병이 아니라 ''''집회를 주동하며 선동질로 대중과 중국 사회의 광기를 부추기고 이끌던'''' 홍위병이다. 괜히 집회의 여파로 인해 살해된 사람의 남편이 쑹빈빈의 사과 주장에 위선이라고 일갈한게 아니다.]를 뒤로한 채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대학 교수, 성공한 사업가등 출세가도의 코스를 착착 밟았다. 그러나 집안 배경이 되고 이미 엄청난 유명인사[* 쑹빈빈과 마오쩌뚱의 대면은 문화대혁명의 상징적인 장면중 하나이다.]로 등극한 쑹빈빈과 달리 이러한 집안배경도 없고 선동되었던 대다수의 홍위병들은[* 국내 언론에서 자꾸 홍위병을 하나로만 보기 때문에 발생한 것인데 현실에서 홍위병들도 엄연히 급이 있었다. 잘나가는 공산당 혁명원로, 당 간부의 자제 출신의 홍위병들과 일반 저소득층, 농민, 빈민 홍위병들] 이후 숙청되어 상산하향 운동[* 적잖은 배경이 있는 사람들도 휩쓸려져서 가긴 했지만 배경있는 자들의 상당수는 다시 복권되어 사회에 복귀한다.]으로 농촌으로 내려가 인생이 사그라졌다.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40114/60146705/1|[동아일보]中 100만 홍위병의 상징… 쑹빈빈, 48년만에 참회]]//[[https://www.yna.co.kr/view/AKR20140201024500074|[연합뉴스]"공산당 혁명원로 딸의 '문혁 과오' 사과는 위선적"]]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